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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안 상몽탄마을

우리네 전통방식으로 집집마다 옹기굽는 향기 폴폴

본문

  • 영산강 가깝고 좋은 흙 보유해 옹기 제작 특화
  • 분청사기전시관 운영하는 김옥수 명장 명맥 이어
  • 미술관·장터·연구소 등 구축해 특성화 단지 조성

‘옹기’란 질그릇과 오지그릇을 아울러 이르는 말로, 주로 ‘약토’(藥土)라는 황갈색의 유약을 입힌 질그릇을 뜻한다. 특히 ‘독’이라는 우리말의 한자어로서 그릇의 형태를 일컫는 말이다. 예로부터 우리네 선조들은 전통적으로 조미료와 주식·부식물의 저장용구, 주류 발효 도구, 음료수 저장 용구 등으로 옹기를 사용했다. 삼국시대부터 만든 옹기는 세계에서 한민족만이 가지는 독특한 음식 저장 용기로 널리 알려져 있다. 흙을 반죽해서 응달에 약간 말린 뒤 떡메로 쳐서 벽돌 모양으로 만들고, 바닥에 쳐서 판자 모양의 타래미로 만드는 ‘판장질’을 거치고, 이 타래미를 물레 위에 올려 놓고 방망이로 다듬으면 옹기 하나가 완성된다. 물레의 속도, 손놀림에 따라 옹기의 모양이 결정나는 만큼 제작자의 숙련된 기술이 요구된다. 공을 들여 만들었던 옹기는 플라스틱·스테인리스 그릇의 등장으로 1960년대 말부터 점점 쇠퇴하기 시작했다. 질그릇 문화가 사라질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도 옹기 굽는 전통을 이어가는 곳이 있다. 바로 무안의 ‘상몽탄마을’이다.

공동 우물 ‘장수정’ 물 맛 좋은 장수마을

무안의 상몽탄마을은 영산강 건너 맞은편 나주 동강면에 있는 몽송마을과 상대되는 마을로, 명산을 하몽탄이라 하고 영산강 건너 몽송마을은 건넷 몽탄이라 불렀다 한다. 영산강 호반도로를 따라 약 1㎞쯤에 위치한 마을로 장시리, 신촌, 상몽탄 등 세 개의 마을로 이뤄졌다. 승달산의 맥을 이은 국사봉을 이어 숲이 우거진 산을 뒤로 하고 마을 앞에는 영산강이 흐르며, 옛날에는 세 개의 포구(석정포, 윗구지, 아랫구지)가 있었다. 상몽탄 마을 앞에는 ‘장수정’이라는 공동 우물이 있는데, 물 맛이 좋기로 소문이 났다. 때문에 이 조그만 마을에선 노인이 무병장수하는 ‘장수마을’이 됐다고 한다. 특히 이곳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1580년경 나주 나씨 나두광이 나주로부터 이곳으로 옮겨 와 마을을 개척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마을에 사는 후손의 말에 따르면 나두광은 나숭대 반역사건으로 피해 다니다 영산강 건너 맞은 편 마을인 복룡마을에서 살았다. 그러다 이곳 상몽탄 마을이 살만한 곳이라 여겨 건너와서 정착했다고 한다.

왕건의 후삼국 통일 거점

무안 상몽탄 마을은 역사적으로도 의미가 남다른 곳이다. 903년 궁예의 명을 받은 왕건이 후백제의 배후를 치기 위해 서해안을 따라 남하해, 영산강을 따라 나주 동강으로 진입했다. 이를 뒤늦게 안 견훤은 대군을 동원해 나주 진출의 길목을 차단하고 왕건군을 포위한 채 대치하고 있었다. 왕건은 물밀 듯이 밀려오는 견훤의 인해전술을 도저히 당해낼 수가 없었다. 목숨을 걸고 부하들을 독려하며 싸웠으나 한 번 기울어진 전세는 회복되지 않고 끝내 왕건군은 견훤군에게 포위당하고 말았다. 죽고 죽이는 피비린내 나는 와중에서도 밤은 찾아왔다. 왕건은 부하의 충고대로 일찍 자야 한다는 말을 듣고, 투구를 벗고 갑옷을 입은 채 잠이 들었다. 꿈에 백발을 휘날리는 노인이 왕건 앞에 나타나, “대업을 이루려는 장군이 주위 환경의 변천도 모르고 잠만 자고 있는가? 지금 영산강 물이 빠져있으니 군사를 이끌고 속히 강을 건너 무안 청용리 두대산을 향해 진군하다, 파군천 하류에 이르러 진을 치고 있으면 견훤군이 뒤쫓을 것이다. 그러면 그곳에 군사를 매복시켰다가 견훤군을 쳐라”라고 말하고 사라졌다. 잠에서 깬 왕건은 백발노인의 말대로 전군 비상소집을 해, 무안 청용리 두대산을 향해 영산강을 건너 파군천을 사이에 두고 전 병력을 산등성이에 매복시켰다. 견훤군은 강의 물이 들고 빠진다는 것을 미처 모르고 뒤늦게 왕건의 뒤를 쫓아갔으나, 좌우 산등성이에 매복하고 있던 왕건군이 협공을 개시해 승리하게 된다. 이 전투에서 후백제 공략의 교두보인 나주 공략의 기틀을 마련했고, 후삼국 통일의 초석을 마련했다.

옹기 명맥 잇기 최적의 장소

이처럼 왕건의 고려 창건의 역사적 전설을 보유하고 있는 상몽탄 마을은 ‘옹기굽는 마을’로도 유명하다. 1912년부터 전통 방식의 옹기를 굽는 마을로, 1960년대에 가장 활성화돼, 마을 주민 모두가 옹기를 만들었던 기록이 있는 곳이다. 이 마을이 옹기마을이 된 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먼저 ‘영산강’이라는 해상교통로를 확보하고 있어서다. 물가와 가까워 제품의 판로나 재료의 운반에 있어서 육지보다는 상대적으로 편리해 물류비용이 많이 들지 않는다. 또한 옹기의 재료인 흙이 많다는 점이다. 실제로 주암호와 목포를 잇는 상수관을 묻으며 몽탄구간에서 확인된 사항으로, 이곳 몽탄지역에는 질 좋은 점토가 넓게 매장돼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도공의 확보가 쉬웠던 것도 한 몫 했다. 이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강진 청자도요지가 있어, 강진에서 청자를 구웠던 도공들이 청자가 쇠퇴하자 이곳으로 흘러와 옹기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마을은 옹기를 생산한 이후 1960년대에 가장 활성화됐는데, 그때는 27세대 100여명의 주민들이 모두 옹기를 만들 만큼 성황리에 이뤄졌다. 옹기 굽는 가마도 4대나 있었다고 하니, 당시의 영화를 짐작할 만 하다. 특히 목포에 있는 삼학양조장에 ‘소주독’을 납품하면서부터 전성기를 구가했다.

쇠퇴해 가는 전통…옛 것 계승·보존 앞장

옹기의 인기도 잠시. 기술의 발전으로 현대인들이 편리함을 추구하면서부터 플라스틱·스테인레스 용기가 각광을 받게 되자, 옹기는 자연스레 쇠퇴의 길을 걷게 됐다. 이 마을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에 사라져가는 전통 문화를 보존하기 위해, 현대 문화부에서는 옹기보호책으로 1989년 5월 옹기인간문화재를 지정했고, 1990년 옹기장(옹기 만드는 기술자)을 중요무형문화재 제96호로 지정했다. 현재 마을의 옹기 굽는 기술은 분청자기 명장인 김옥수 명장이 그 명맥을 잇고 있다. 김옥수 명장의 4대조 할아버지가 쓰던 120년 된 가마와 근래 들어 만들어진 개량가마 등 두 대가 이 마을에 보존되고 있다. 현재 상몽탄 마을 사람들은 옛 것을 계승하고 보존할 수 있는 옹기미술관, 옹기 장터, 옹기 연구소 등과 같은 특성화 단지를 조성할 계획을 갖고 움직이고 있다. 이처럼 영산강 줄기 따라 옹기를 굽던 도공들이 정착해 생긴 마을에선 옛 것을 계승하고 보존하며 후세대에게 물려주기 위한 노력을 끊임없이 기울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