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영광 진성마을

‘조선 500년’ 역사․문화 숨결, 온 몸으로 느낀다

본문

  • 국방요새 ‘법성진’․법성창․진성 등 자리…역사적 오감 ‘자극’
  • 체류형 관광명소 ‘주목’…먹거리․볼거리․즐길거리 등 즐비
  • 마을공동체 사업 활발…탐방길 등 문화공간 조성 ‘주력’

영광의 한 마을에는 조선 500년의 역사와 문화가 깃들여져 있다. 예로부터 3대 명절의 하나인 ‘단오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진성마을이다. 법성포 해문(海門)인 3개의 섬(호랑이섬, 고양이섬, 쥐섬)을 지나 바닷길과 그 주변에는 험한 바다를 상대로 생업을 이어가던 우리 조상들의 한과 인생살이가 담긴 각종 설화와 흔적이 가득하다. 최근에는 진성마을 일대에 간직하고 있는 역사의 향기를 드러내고자 하는 노력이 진지하게 벌어지고 있다. 마을공동체 사업을 통해 법성포 역사·문화 탐방길과 제월정 복원 등 문화 공간을 조성해 나가고 있다.

조선시대 흔적 ‘가득’

진성마을은 조선시대 498년 동안(1397-1895년) 국방의 요새인 ‘수군진(법성진)’과 국가 재정의 중추기관인 ‘조창(법성창)’이 430년 동안(1460-1890년) 자리했던 마을이다. 조선시대 법성진의 치소가 106년 동안(1789-1895년) 자리했던 행정중심지였고, 조선시대 법성면 29개 마을 가운데 가장 큰 마을이자 중심 권역이었다. 500년 전에 쌓은 ‘법성진성’이 원형 가깝게 보존되고 있는 마을로, 법성진성이 자리한 마을이라 해 진성마을이라 불리고 있다. 조선의 명산이자 영광군의 대표특산인 ‘영광굴비’의 본산지로, 현재 각종 기념비와 역사안내판이 들어서 있다. 지난 2014년 법성진성축성 500주년을 기념해 영광군과 군의회의 도움을 받아 숲쟁이 공원에 법성진성 축성 500주년 기념비가 세워졌고, 군의 예산지원과 주민들의 협조로 좁은 마을길을 넓혀 주차장을 마련했다. 올해는 ‘법성포역사문화 탐방길’을 만들고 방문객들이 법성포(법성진과 법성창)가 품고 있는 역사의 향을 체계적으로 맡을 수 있도록 했다. 법성진성과 법성창이 지니고 있는 역사적 가치는 매우 크고 높은 만큼 대를 이어 써 전해오고 있는 법성사람들의 기록과 이야기들은 법성진과 법성창에 대한 역사적 오감을 자극한다. 세금으로 낼 곡식을 싣고 법성포로 온 사람들, 그 곡식을 보관했다가 한양까지 싣고 간 뱃사람들, 그리고 조운선을 타고 가다 태풍을 만나 한꺼번에 목숨을 잃은 300여명의 조군과 민초들, 중국까지 표류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 온 조운선원들을 친히 만난 영조의 이야기가 전해온다. 또 일제의 침략에 저항하던 피 끓던 법성포 사람들, 굴비산업을 통해 발돋움하고 있는 현재의 법성포이야기까지, ‘지붕 없는 박물관’으로 불릴 정도로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다.

호남 대표항구 ‘중심지’

인의산(해발 165m)과 대통재 사이의 법성진성 안에 자리하고 있는 진성마을은 조선시대를 연구하는데 있어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 진성마을 일대에는 법성진의 흔적을 헤아릴 수 있는 성터와 각종 건물터가 남아있다. ‘영남호남연해형편도’에 따르면 법성리와 함께 법성포구에 잇닿아 있는 이 마을 앞 포구는 산들이 감싸고 있는 천혜의 항구로, 과거에는 천여척의 배들이 안전하게 정박할 수 있었던 호남권역의 대표적인 항구였다고 기록돼 있다. 1512년 영산창이 폐쇄된 후 법성창이 조선 최대의 조창이 되자, 1514년에 둘레 1천688척(500여m), 높이 12척(3.6m)의 성을 쌓았다. 이 성이 법성진성이다. 옹성형의 법성진성은 군사적·학술적 가치가 높아 전남도지정문화재로 지정돼 있는 등 1895년 폐진 당시 이 성의 둘레가 3천62척에 높이가 8척7촌이라고 ‘법성진진지’에 기록돼 있다. 영산창 인근의 강바닥이 높아져 조운선을 대기 어렵게 되자 법성창에서 인근 28개 고을의 세곡을 모두 수납하게 됐다. 법성창이 세곡을 받아들이고, 보관하고, 한양으로 실어 나르는 전라도 물류의 중심지가 된 것이다. 국가재정에 있어 법성창이 중요한 시설이 됨에 따라 법성진 일대의 바다를 지키는 수군부대의 규모도 커졌다. 조선 초에는 흥덕진 예하의 수군부대가 법성진을 지켰다. 그리고 태종 8년(1408) 만호진으로 그 실체가 드러난다. 숙종34년(1708)에는 첨사진(僉使鎭)으로 승격됐다. 이에 따라 법성진에는 종3품의 첨사가 보임됐다. 영광군수보다 품계가 높은 첨사가 고을의 우두머리가 됨에 따라 자연 고을의 품격 역시 높아졌다. 법성진은 정조 13년(1789)에 독립된 진(獨鎭)이 됨에 따라 독자적인 행정권역이 됐다. 정조는 ‘영광군에서 진량면을 떼어내 독립된 진으로 삼으라’(靈光郡 陳良一面 付之法聖 仍作獨鎭)라고 지시했다고 ‘정조실록’에 의해 전해진다. 법성진은 영광군에서 떨어져 나와 진량면(현 법성면)의 토지세와 군역을 부과하고 양곡을 대여하는 등의 삼정(三政)을 독자적으로 수행했다. 국가의 가장 중요한 재정인 양곡을 수납하고 한양으로 실어 나르는 책임을 진 법성진 첨사는 중요한 관직이 됐다. 서해바다를 지키는 법성진 역시 중요수군기지로 인식됐다.

역사․문화 보물창고

진성마을 구석구석에 남아 있는 역사·문화 공간은 ‘꿰매지지 않은 역사․문화의 보물창고’로 불릴 정도로 그 가치가 남다르다. 법성진성을 비롯한 객사, 동헌, 작청, 장청, 동조정, 12고을의 세곡고 터 등이 곳곳에 산재돼 있는 등 지리학적으로 관광명소의 조건을 충족하고 있다. 진성마을은 영광군 4대 종교 성지의 하나(불교)로, 이곳을 기점으로 불교→원불교→천주교→기독교→섬 투어(낙월, 송이, 안마도 등)→가마미→법성포로 이어지는 원점 회귀, 체류형 관광지로 각광을 받을 수 있는 유망한 지역이다. 특히 ‘호남의 명루(名樓)요, 법성포의 백미(白眉)’라 했던 조선 효종 때 건립된 ‘제월정’ 복원을 앞두고 있으며, 조선 후기 실학자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법성포의 절경을 중국의 동정호에 비유해 ‘소동정’이라 예찬하기도 했다. 진성마을은 또 볼거리부터 즐길거리, 쉴거리, 먹거리까지 ‘여행 4박자’를 골고루 갖춰진 마을이다. 법성포단오제 전수 교육관과 백제불교최초도래지, 한국의 10대 드라이브 코스 가운데 하나인 서해 낙조길과 구수산의 칠산 전경 등을 만끽할 수 있으며, 골프를 비롯한 승마, 낚시, 등산, 트래킹 등을 즐길 수 있는 현장이 반경 5㎞ 내에 자리하고 있다. 게다가 ‘북에는 평양요리, 남에는 영광굴비’라고 불릴 정도로 ‘영광굴비 산업’의 뿌리를 두고 있으며, 마을 곳곳에 굴비를 비롯한 장어요리 등 마을 고유의 음식을 맛볼 수 있다. 진성마을은 진성복원, 성지순례, 섬 투어 등 무궁한 잠재력을 지닌 마을이자 다양한 콘텐츠 개발이 용이한 마을로 주목받고 있으며, 전남방조제 주변 유휴지의 효율적인 이용과 재편으로 지역 경제의 활력을 되살리는 등 일자리와 신산업을 창출하는 마을로 재탄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