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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 고산마을

유구한 역사가 고산서원에서 의로움으로 깃들다

본문

  • ‘산수 좋기로는 첫째가 장성이요’
  • ‘장안만목(長安萬目) 불여장성일목(不如長城一目)’
  • 장성 진원현의 행정의 중심지였던 천년고성 진원성

선비의 고장인 장성은 역사와 전통이 유구하다. 특히 고산마을은 조선 후기 성리학의 대가로서 위정척사론을 주장하며 민족정신을 불러일으켰던 노사 기정진 선생과 그의 제자 8명을 배향한 고산서원으로 유명한 마을이다. 진원현의 행정의 중심지였던 천년고성 진원성은 고려시대 12세기 이전에 현성을 쌓아서 정유재란으로 폐허가 되기 이전까지 고을을 다스린 성으로 현재에도 성곽터가 남아있다. 이처럼 의로움이 깃든 불태산 아래 고산마을은 사방이 탁 트여 전망이 막힘이 없어 지나는 이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산수 좋기로는 첫째가 장성이요’

암행어사 박문수가 말하길 ‘산수 좋기로는 첫째가 장성이요, 둘째가 장흥’이라고 했을 만큼 장성은 풍광이 빼어난 고장이다. 고산마을은 불태산 기슭 한 중앙에 위치 해 있다. 불태산과 삼성산을 이으며 형성된 계곡에 자리잡은 고산마을은 불태산의 남쪽에 위치하고 동쪽으로는 병풍산과 삼인산이 있으며 그 주변으로는 송강 정철과 석탄 이기남이 강학했던 정이암터를 비롯한 상청사, 하청사, 인원사 등 80여개의 절터가 있는 유서 깊은 지역이다. 불태산 산신령이 점지해서 비범한 아이가 태어났으나 부모의 잘못으로 인해 장수가 되지 못한 장군굴에 얽힌 재미난 전설과 불태산을 뒤로 두고 앞으로는 사방이 탁 트여 전망이 막힘이 없는 마을은 지나는 이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지형은 삼성산과 불태산과 죽림산에 둘러싸여 있고, 남쪽으로 칠천(漆川)이 흘러 하나의 작은 산간분지를 형성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삼성산에 산성이 있었다고 하며, 진원은 성곽도시였으며 부근에 진원창과 영신역(永新驛)이 있었다고 한다. 불태산 정상에 오르면 광주와 담양 대전면, 광산구가 조망되며 특히 진원면은 첨단3지구가 개발되면서 배후도시로 각광을 받고 있다.

‘장안만목(長安萬目) 불여장성일목(不如長城一目)’

7살에 맷돌을 보고 시를 지었던 천재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9)선생을 일러 ‘장안만목(長安萬目) 불여장성일목(不如長城一目)’이라 했다. 이 말은 ‘서울(장안)에 있는 만 개의 눈이 전남 장성에 있는 하나의 눈만 못하다’는 뜻으로 선생은 어려서 천연두를 앓아 애꾸눈(외눈박이)이 되었는데 청나라 사신이 조선에 인물이 있는지 알아보려고 낸 문제를 서울에 사는 학식있는 자들은 풀지 못할 때 장성에 있는 애꾸눈을 한 어린 기정진이 풀었다해서 생겨난 말이다. 고산서원은 기정진 선생이 1878년(고종 15년)에 정사(精舍)를 지어 담대헌(澹對軒)이라 이름짓고 학문을 강론하던 곳으로 1924년에 후손들이 중건하여 1927년에 고산서원(高山書院)이라는 편액을 걸었으며 1982년에 전라남도기념물 제63호로 지정되었다. 시호는 문정공이다. 19세기 중엽 노사학파를 이끈 거두 기정진은 우리민족이 나아가야 할 바를 이일분수(理一分殊)와 공공(公共)에 바탕을 둔 경세론을 제시하면서 1862년 임술의책(壬戌擬策)을 지어 부패한 사회의 개혁과 공공(公共)의 사회와 정치와 질서를 부르짖었다. 그의 위정척사론은 사대부층의 도덕적 해이와 특권의식을 비판하는 것인데 이러한 기정진의 위정척사사상과 주리론은 600명에 달하는 문인들에게 계승되었다. 특히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으로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났을 때는 그의 제자이며 손자인 송사 기우만이 1896년 장성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1905년에 을사늑약으로 국권이 침탈되자 고광순(高光洵)은 1907년 창평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기삼연도 300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합류하면서 호남의병을 망라해 호남창의회맹소를 결성해 곳곳에서 의병운동을 전개해나갔다. 현재 고산서원은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지원하는 유교아카데미 강좌를 성균관 유교문화 활성화 사업의 일환으로 개설을 하고 전문강좌에 논어, 대학 등 고전을 비롯해 송사 기우만의 의병활동을, 교양강좌로 장성의 역사와 문화, 장성지역의 유교, 고문서로 조선시대 장성인을 만나는 등 12회 동안 전문 교양강좌 수업을 실시했다.

장성 진원현의 행정중심지였던 천년고성 진원성

진원현의 행정중심지였던 진원성은 1894년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12호로 지정되었다. 해발 약40m의 작은 봉우리에 있는 진원성은 평평한 분지형의 두 봉우리를 연결하여 축조된 진원현의 현성(縣城)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진원현은 백제때 구사진혜현(丘斯珍兮縣)이었다가 통일신라 경덕왕 때 진원으로 고쳐져 갑성군(지금의 장성군)에 속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의 길이는 약 800m로 표고 40m 정도의 작은 봉우리에 위치한 포곡형(包谷形) 산성으로 3개의 골짜기를 끼고 있으며 ‘서고동저’형의 석축산성인 진원성은 성 내외벽이 모두 2~3단으로 축조돼 있다. 초축 이후 내외벽 모두 한 겹의 석축이 덧대어져 축조된 점이 특징이다. 고려시대 명종(재위 1170~1197) 때의 문인인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진원성에 대한 언급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 12세기 이전에 현성을 쌓아서 정유재란으로 폐허가 되기 이전까지 고을을 다스린 성으로 추정하고 있다.

문화거점사업으로 이뤄낸 유물전시관과 수변산책로

고산마을은 진원면에서는 가구수가 가장 많으며 85가구 120여명이 살고 있다. 현재 마을가꾸기 사업의 일환으로 문화거점사업이 진행되고 있으며 복지회관을 리모델링을 하여 마무리 단계에 있다. 복지회관 안에는 유물전시관과 책을 보거나 한글을 배울 수 있는 도서관이 마련돼 있으며, 그 옆 창고에는 벽화를 그려 마을 경관조성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특이하게도 마을의 유물이 120여점 있는데 옛날의 생활상을 들여다 볼 수 있어 관광매력물이라 한다. 마을의 어르신들에게 한글배우기를 고산회관에서 2회 차에 걸쳐 진행을 했는데 호응도가 좋았다. 모든 서류에 도장이 아닌 사인을 받아야 하는 요즈음 한글을 배우고 나서 직접을 사인을 하면서 뿌듯해하는 모습과 손자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느끼는 보람은 문화거점사업의 성과라고 했다. 현재 진원제에 수변길 조성이 마무리 되어가고 있는데 고산서원에서 진원성을 거쳐 오층석탑을 둘러보고 수변길을 걸으면서 산책할 수 있는 관광루트는 고산마을이 관광지로서 지향하는 목표이다. 진원성 복원사업 또한 진행중이며 불태산 등산로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불태산 아래 캠핑장은 주말이면 젊은 층들이 가족단위로 찾는데 담양과 광주에서 30분이내의 거리이다. 고산마을은 청정지역으로 장수마을이다. 마을의 소득원으로 복숭아, 포도, 감, 딸기, 토마토, 장미를 재배하고 있으며 그 중에 불태산 차돌복숭아가 아주 유명한데 육질이 단단하고 향이 깊고 맛이 좋다. 마을의 보물은 농부시인이며 향토사학자인 김창현(85세)선생으로 이 마을의 자랑거리이다. 100편이 넘는 시를 썼으며 젊은 시절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하여 ‘고산마을사’라는 마을의 역사가 한권의 책으로 출간하기도 했다.